빅토리아 시대 조지 엘가 힉스 [www.ntdtv.co.kr 2015-02-22]​​ 카라 리산드라 로스(Kara Lysandra Ross) : 2015년 2월 22일​ "해변에서," 1879년, 조지 엘가 힉스,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아트 리뉴얼 센터의 허락 하에 게재됨) "공정한 비평가들," 1886년, 조지 엘가 힉스,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아트 리뉴얼 센터의 허락 하에 게재됨)​ "런던의 "폴링" 태번에서 고아 아기 데려오기," 1865년, 조지 엘가 힉스,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아트 리뉴얼 센터의 허락 하에 게재됨)(태번,Tavern : 런던의 펍 레스토랑의 일종)​​ "여성의 임무 : 남성의 동반자," 조지 엘가 힉스, 캔버스에 유화, 런던 테이트 미술관 (테이트 미술관의 허락 하에 게재됨)​ "인생의 햇살," 1981년, 조지 엘가 힉스,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아트 리뉴얼 센터의 허락하에 게재됨)​ "구름의 은빛 테두리," 1890년, 조지 엘가 힉스,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 (아트 리뉴얼 센터의 허락 하에 게재됨) 조지 엘가 힉스(1824–1914)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학자들에게서 매우 인정받았던 아티스트의 한 명이지만, 오늘날 일반 대중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당대의 탁월한 화가였고 1893년까지 왕립 아카데미(Royal Academy (RA))에 전시한 작품 수가 112점이나 되었다. 1760년에서 1893년 사이에 런던의 주요한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한 화가의 수는 대략 22,000명이다. 그 중 왕립 아카데미에 힉스보다 더 많은 작품을 전시한 화가는 ‘비(非) 혹은 안티 왕립 아카데미 화가’ 중에서는 22명이고, 전체 화가 중에서는 단지 90명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1893년 이후에도 힉스는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예술가이며 21세기인 지금도 그의 재능은 여전히 중요하다. 힉스는 초상화를 많이 그렸지만, 그를 더 유명하게 한 것은 빅토리아 시대의 생활 풍속화였다. 그가 쓰는 대부분의 색은 빅토리아 시대 예술의 일반적 특징 그대로 생동감이 넘쳤다. 하지만 그는 스타일에서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개성적 스타일을 실험했다. 한 가지는 그의 작품 버터컵(Buttercups)에서처럼 배경을 약간은 느슨하고 인상주의에 가깝게 그린 것과, 또 한 가지는 작품 ‘여성의 임무 : 남성의 동반자(Woman’s Mission: Companion of Manhood)’에서 보이듯이 라파엘 전기(pre-Raphaelite)처럼 매우 타이트한 화풍이다. 비록 힉스는 주로 인물에 주목했지만 그의 스타일이나 주제는 일생을 거쳐 극적인 변화들을 보였다. 그의 생애 초기에, 그의 작풍은 윌리엄 파웰 퍼스(William Powell Firth)의 군중화와 비슷했다. 그리고 나서 그의 화풍은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PRB))의 스타일에 가깝게 바뀐다. 그러면서도 그는 존 에버릿 밀라스 (John Everett Millais)의 작품처럼 라파엘 전파와는 반대되는 비교적 느슨한 작풍도 보여주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시대의 흐름을 충분히 따라가면서도, 주제 상으로는 광범위한 것을 그려내는 그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주제는 농장 노동자, 상류사회, 군중, 사색하는 청소년, 부게로(Bouguereau) 풍의 ‘아이들과 함께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까지 그 주제는 실로 다양하다. 햄프셔(Hampshire)의 치안판사의 아들로써, 힉스는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고 힉스는 16세부터 18세까지 유니버시티 칼리지 스쿨(UCS)을 다녔다. 그러나 이것은 힉스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는 1843년에 블룸즈베리(잉글랜드 남동부)의 사스 아카데미(Sass’s Academy)를 다녔고 1844년부터는 왕립 아카데미 스쿨을 다녔다. 힉스는 1847년에 마리아 해리스(Maria Hariss)와 결혼했다. 가족과 하인들의 수가 너무 빨리 늘어나자 그는 노팅힐(Notting Hill)과 베이스워터(Bayswater)에 있는 더 큰 집으로 이사했다. 그는 1848년부터 1854년 사이에, 6명의 자녀를 입양해서 총 8명의 자녀를 두었다. 1853년에 그는 "인체 드로잉 가이드북" 을 발간했다. 이 책은 여러 차례 재간되었고 설명과 그림 전체를 현재도 온라인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힉스는 인체와 회화 작품에 대한 그의 생각을 논술하여,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술과 사람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신의 뜻에 따라 갖추게 된 능력과 우주 전체가 보여주는 디자인의 통일성을 깊이 생각해볼 때 우리가 얻는 환희는, 우리가 시선을 최후의 피조물이자 최상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돌렸을 때 가장 커진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원래는 완벽했지만 의도적으로 유한한 존재이게끔 한정 받은 우리<인간> 능력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에게 있어서, 동물들의 능력을 조합하여 나온 완벽함은 위대한 목적이 부여한 그의 상태에 제약을 받기에, 사람의 지적 능력, 도덕적 감수성, 그리고 불멸의 정신에 의해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힉스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윌리엄 파웰 퍼스에게 영감을 준 군중 장면들이다. "배당금 받는날, 영국은행(Dividend Day, Bank of England)"(1859)," “중앙우체국, 1분에서 6분(The General Post Office, One Minute to Six)” (1860), “고아 아기 고르기-런던의 ‘폴링’ 태번에서(An Infant Orphan Election at the London Tavern ‘Polling")” (1865), 그리고 수산시장인 “빌링즈 게이트 시장(Billingsgate Market)” (1870)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군중 장면은 1983년 런던 제프리 미술관(The Geffrye Museum)의 전시 주제가 되었다. 이는 미술관 측이 결혼식 장면을 그린 그의 작품 "집 바꾸기(Changing Homes)” (1862)를 전시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빅토리아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북적거리는 풍속화에 대한 흥미가 1870년대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자 힉스는 작업 영역을 초상화 쪽으로 옮겼다." 빅토리아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북적거리는 풍속화에 대한 흥미가 1870년대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자 힉스는 작업 영역을 주문 초상화 및 새로운 풍속화 쪽으로 옮겼다. 이 새로운 풍속화들 중에는 개인 혹은 작은 그룹들에 대한 심미적 심리학적 연구가 담겨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비록 그는 그의 군중 장면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명해졌지만, 그를 가장 유명하게 해 준 작품은 그가 미녀와 아이들을 그린 후기의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가장 인기 있던 동시대인들의 작품과 매우 유사하다. 예를 들면,힉스는 그의 작품 "공정한 비평가들(The Fair Critics)," 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7명의 아름다운 젊은 여인들을 그렸다. 그녀들이 보는 것은 오페라라든가 세익스피어의 연극 같은 어떤 작품인 듯 보인다. 그녀들은 그것을 보면서 각자의 취향에 따라 흥미를 보이는가 하면 즐거워하거나 따분해하고 있다. ‘공정한 비평가들’이라는 제목은 일종의 언어유희로서, 그림을 볼 줄 아는 관람자들에게 재미를 더해주고자 19세기 화가들이 자주 쓰던 수단이었다. 이 그림의 경우 비평가들은 아름다움에 있어서 공평하고(fair) 공연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다(fair). 힉스는 강렬하고 붉게 채색되어 아주 인상적인 부채를 구도의 중심에 놓았다. 비록 이것이 그림을 압도해 버릴 수 도 있지만, 주제들을 그려낸 정교하고 섬세한 작업은 부채와 아름답게 균형을 맞추어 작품 구성<구도>을 성공적으로 잡아주었다. 힉스는 또한 어려운 주제 다루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작품 "구름의 은빛 테두리(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이제 막 사망한 아이의 몸을 검사하는 것 같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묘사하고 있다. 은빛의 흰 앵글(angle)은 은빛의 천사가 그 옆에서 춤추고 있는 아이의 영혼을 데리고 폭풍의 구름을 뚫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림은 작품의 제목을 상징하는 밝고 어두움의 거친 대각선으로 나뉘어져 있다. 비록 땅에서는 괴롭고 앞날이 암담하지만, 구름 뒤에는 행복과 빛이 있다. 신발을 벗고 있는 아버지의 자세도 흥미를 끈다. 아이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조심성도 드러난다. 이런 것들은 아이가 죽는 순간 까지도 부모가 걱정스러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그는 왕립 영국 예술가 협회 (Royal Society of British Artists)의 멤버였고 그의 딸, 애니 힉스(Annie Hicks)는 1942년에 집에 있던 작품 100점을 사우스 햄턴 시 갤러리(Southampton City Art Gallery)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형태 연구들이지만, 몇몇은 그의 중요한 그림들의 토대가 되었다. 힉스의 작품을 소장한 대중 컬렉션에는 영국의 맨체스터 시립 갤러리(Manchester City Art Gallery, UK), 사우스 햄턴 시립 갤러리(Southampton City Art Gallery, UK), 테이트 미술관(Tate Gallery, UK), 런던 미술관(Museum of London, UK), 제프리 미술관(Geffrye Museum, U.K.), 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의 헌팅턴 도서관(The Huntington Library, California USA.)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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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 조지 엘가 힉스
  • [www.ntdtv.co.kr   2015-02-22]​​

     카라 리산드라 로스(Kara Lysandra Ross) : 2015년 2월 22일 

     

    "해변에서," 1879년, 조지 엘가 힉스,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

    (아트 리뉴얼 센터의 허락 하에 게재됨)

       

     "공정한 비평가들," 1886년, 조지 엘가 힉스,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

    (아트 리뉴얼 센터의 허락 하에 게재됨)

     

    "런던의 "폴링" 태번에서 고아 아기 데려오기," 1865년, 조지 엘가 힉스,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

    (아트 리뉴얼 센터의 허락 하에 게재됨)(태번,Tavern : 런던의 펍 레스토랑의 일종)

     

    "여성의 임무 : 남성의 동반자," 조지 엘가 힉스, 캔버스에 유화, 런던 테이트 미술관

    (테이트 미술관의 허락 하에 게재됨)

     

    "인생의 햇살," 1981년, 조지 엘가 힉스,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

    (아트 리뉴얼 센터의 허락하에 게재됨)

     

     

     "구름의 은빛 테두리," 1890년, 조지 엘가 힉스, 캔버스에 유화, 개인소장

    (아트 리뉴얼 센터의 허락 하에 게재됨)

     

    조지 엘가 힉스(1824–1914)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학자들에게서 매우 인정받았던 아티스트의 한 명이지만, 오늘날 일반 대중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당대의 탁월한 화가였고 1893년까지 왕립 아카데미(Royal Academy (RA))에 전시한 작품 수가 112점이나 되었다.

     

    1760년에서 1893년 사이에 런던의 주요한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한 화가의 수는 대략 22,000명이다. 그 중 왕립 아카데미에 힉스보다 더 많은 작품을 전시한 화가는 ‘비(非) 혹은 안티 왕립 아카데미 화가’ 중에서는 22명이고, 전체 화가 중에서는 단지 90명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1893년 이후에도 힉스는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예술가이며 21세기인 지금도 그의 재능은 여전히 중요하다.

     

    힉스는 초상화를 많이 그렸지만, 그를 더 유명하게 한 것은 빅토리아 시대의 생활 풍속화였다. 그가 쓰는 대부분의 색은 빅토리아 시대 예술의 일반적 특징 그대로 생동감이 넘쳤다. 하지만 그는 스타일에서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개성적 스타일을 실험했다. 한 가지는 그의 작품 버터컵(Buttercups)에서처럼 배경을 약간은 느슨하고 인상주의에 가깝게 그린 것과, 또 한 가지는 작품 ‘여성의 임무 : 남성의 동반자(Woman’s Mission: Companion of Manhood)’에서 보이듯이 라파엘 전기(pre-Raphaelite)처럼 매우 타이트한 화풍이다. 비록 힉스는 주로 인물에 주목했지만 그의 스타일이나 주제는 일생을 거쳐 극적인 변화들을 보였다.

     

    그의 생애 초기에, 그의 작풍은 윌리엄 파웰 퍼스(William Powell Firth)의 군중화와 비슷했다. 그리고 나서 그의 화풍은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PRB))의 스타일에 가깝게 바뀐다. 그러면서도 그는 존 에버릿 밀라스 (John Everett Millais)의 작품처럼 라파엘 전파와는 반대되는 비교적 느슨한 작풍도 보여주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시대의 흐름을 충분히 따라가면서도, 주제 상으로는 광범위한 것을 그려내는 그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주제는 농장 노동자, 상류사회, 군중, 사색하는 청소년, 부게로(Bouguereau) 풍의 ‘아이들과 함께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까지 그 주제는 실로 다양하다. 

     

    햄프셔(Hampshire)의 치안판사의 아들로써, 힉스는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고 힉스는 16세부터 18세까지 유니버시티 칼리지 스쿨(UCS)을 다녔다. 그러나 이것은 힉스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는 1843년에 블룸즈베리(잉글랜드 남동부)의 사스 아카데미(Sass’s Academy)를 다녔고 1844년부터는 왕립 아카데미 스쿨을 다녔다. 힉스는 1847년에 마리아 해리스(Maria Hariss)와 결혼했다. 가족과 하인들의 수가 너무 빨리 늘어나자 그는 노팅힐(Notting Hill)과 베이스워터(Bayswater)에 있는 더 큰 집으로 이사했다.

     

    그는 1848년부터 1854년 사이에, 6명의 자녀를 입양해서 총 8명의 자녀를 두었다. 1853년에 그는 "인체 드로잉 가이드북" 을 발간했다. 이 책은 여러 차례 재간되었고 설명과 그림 전체를 현재도 온라인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힉스는 인체와 회화 작품에 대한 그의 생각을 논술하여,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술과 사람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신의 뜻에 따라 갖추게 된 능력과 우주 전체가 보여주는 디자인의 통일성을 깊이 생각해볼 때 우리가 얻는 환희는, 우리가 시선을 최후의 피조물이자 최상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돌렸을 때 가장 커진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원래는 완벽했지만 의도적으로 유한한 존재이게끔 한정 받은 우리<인간> 능력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에게 있어서, 동물들의 능력을 조합하여 나온 완벽함은 위대한 목적이 부여한 그의 상태에 제약을 받기에, 사람의 지적 능력, 도덕적 감수성, 그리고 불멸의 정신에 의해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힉스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윌리엄 파웰 퍼스에게 영감을 준 군중 장면들이다. "배당금 받는날, 영국은행(Dividend Day, Bank of England)"(1859)," “중앙우체국, 1분에서 6분(The General Post Office, One Minute to Six)” (1860), “고아 아기 고르기-런던의 ‘폴링’ 태번에서(An Infant Orphan Election at the London Tavern ‘Polling")” (1865), 그리고 수산시장인 “빌링즈 게이트 시장(Billingsgate Market)” (1870)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군중 장면은 1983년 런던 제프리 미술관(The Geffrye Museum)의 전시 주제가 되었다. 이는 미술관 측이 결혼식 장면을 그린 그의 작품 "집 바꾸기(Changing Homes)” (1862)를 전시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빅토리아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북적거리는 풍속화에 대한 흥미가 1870년대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자 힉스는 작업 영역을 초상화 쪽으로 옮겼다."

     

    빅토리아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북적거리는 풍속화에 대한 흥미가 1870년대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자 힉스는 작업 영역을 주문 초상화 및 새로운 풍속화 쪽으로 옮겼다. 이 새로운 풍속화들 중에는 개인 혹은 작은 그룹들에 대한 심미적 심리학적 연구가 담겨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비록 그는 그의 군중 장면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명해졌지만, 그를 가장 유명하게 해 준 작품은 그가 미녀와 아이들을 그린 후기의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가장 인기 있던 동시대인들의 작품과 매우 유사하다.

     

    예를 들면,힉스는 그의 작품 "공정한 비평가들(The Fair Critics)," 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7명의 아름다운 젊은 여인들을 그렸다. 그녀들이 보는 것은 오페라라든가 세익스피어의 연극 같은 어떤 작품인 듯 보인다. 그녀들은 그것을 보면서 각자의 취향에 따라 흥미를 보이는가 하면 즐거워하거나 따분해하고 있다.

     

    ‘공정한 비평가들’이라는 제목은 일종의 언어유희로서, 그림을 볼 줄 아는 관람자들에게 재미를 더해주고자 19세기 화가들이 자주 쓰던 수단이었다. 이 그림의 경우 비평가들은 아름다움에 있어서 공평하고(fair) 공연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다(fair). 힉스는 강렬하고 붉게 채색되어 아주 인상적인 부채를 구도의 중심에 놓았다. 비록 이것이 그림을 압도해 버릴 수 도 있지만, 주제들을 그려낸 정교하고 섬세한 작업은 부채와 아름답게 균형을 맞추어 작품 구성<구도>을 성공적으로 잡아주었다.

     

    힉스는 또한 어려운 주제 다루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작품 "구름의 은빛 테두리(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이제 막 사망한 아이의 몸을 검사하는 것 같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묘사하고 있다. 은빛의 흰 앵글(angle)은 은빛의 천사가 그 옆에서 춤추고 있는 아이의 영혼을 데리고 폭풍의 구름을 뚫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림은 작품의 제목을 상징하는 밝고 어두움의 거친 대각선으로 나뉘어져 있다. 비록 땅에서는 괴롭고 앞날이 암담하지만, 구름 뒤에는 행복과 빛이 있다. 신발을 벗고 있는 아버지의 자세도 흥미를 끈다. 아이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조심성도 드러난다. 이런 것들은 아이가 죽는 순간 까지도 부모가 걱정스러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그는 왕립 영국 예술가 협회 (Royal Society of British Artists)의 멤버였고 그의 딸, 애니 힉스(Annie Hicks)는 1942년에 집에 있던 작품 100점을 사우스 햄턴 시 갤러리(Southampton City Art Gallery)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형태 연구들이지만, 몇몇은 그의 중요한 그림들의 토대가 되었다. 힉스의 작품을 소장한 대중 컬렉션에는 영국의 맨체스터 시립 갤러리(Manchester City Art Gallery, UK), 사우스 햄턴 시립 갤러리(Southampton City Art Gallery, UK), 테이트 미술관(Tate Gallery, UK), 런던 미술관(Museum of London, UK), 제프리 미술관(Geffrye Museum, U.K.), 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의 헌팅턴 도서관(The Huntington Library, California USA.) 등이 있다. 

     


  • 글로벌 원문 링크:www.theepochtimes.com/n3/1258578-rediscovering-victorian-painter-george-elgar-hi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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