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루소 : 엄청난 재능의 까다로운 화가(한,영) 크리스틴 린, 에폭 타임즈, 2014년 10월 8일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의 일몰,” 1848-1850년 경, 테오도르 루소 작, 종이위에 유채와 흑연, 캔버스위에 배접.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 DC) 그는 활동기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본인도 이를 알고 있었다. 오늘날 카미유 코로와 장 프랑수와 밀레와 같은 이름은 여러분이 들어본 적이 있겠지만, 테오도르 루소의 이름은 어떨지 모르겠다. 루소는 1800년대의 많은 재능 있는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인상파의 전성기에 파묻혀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루소를 창시자로 보는 바르비종파는 인상파 화가들을 성장시켜주었다. 자연주의 풍경화인 바르비종파는 고전 풍경화와 인상파 그림 사이의 과도기에 등장했다. 루소(1812~1867)는 일류 예술 살롱의 판단 기준에 대해, 찬반 논란이 뜨겁던 시기에 작품 활동을 했다. 끝맺음을 어떤 수준으로 해야 그림이 완성된 것인가? 거친 표현은 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순수 풍경에는 (루소의 빵과 버터 같은) 서술(narrative)이 없으며, 심지어 타당한 장르도 없다고 봐야 하는 것인가? 파리, 세느강 너머 다리가 있는 풍경 1830-1833년 경 종이에 유채, 캔버스 배접(개인 소장) ---------------------------------------------------------------------------------------------------------------“그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라 대하기가 좀 어려웠다.그리고 아주 독립적 마인드를 가졌다.” 에이미 컬랜더(Amy Kurlander), 예술사가, 큐레이터--------------------------------------------------------------------------------------------------------------- 1829년에, 루소는 쁘리 드 롬므(Prix de Rome, 로마의 상) 장학금을 받으려 노력했지만 1심에서 탈락하였다. 그러나 그는 운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서 1830년대 초기에는, 파리 살롱(Paris Salon)의 아카데미 데 보자르 (Académie des Beaux-Arts, 미술 아카데미)의 연례 전시회에 작품이 전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1836년에는 그런 혜택도 중단되었다. 1842년이 되자 루소는 그런 일들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말자고 결정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르 그랑 레퓌제(Le Grand Refusé​)”-‘거절당한 대가(大家)’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제도권에 의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평판은 그에게 (오히려) 득이 되었습니다.” 에이미 컬랜더는 말한다. 컬랜더는 현재 루소의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모건 박물 도서관(Morgan Library & Museum)의 ‘길들이지 않은 풍경(The Untamed Landscape)’ 전시회에서 객원 큐레이터를 담당하고 있다. “그는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대하기 좀 어려웠죠. 그리고 아주 독립적 마인드를 가졌습니다.” 컬랜더는 말한다. 그가 1855년경 찍은 사진을 보면 머리는 벗겨지기 시작했고 얼굴에는 수염이 났다. 두 눈은 카메라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살롱에서 무시당하던 시절에도 핵심 지지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를 옹호하고 그의 대중적 이미지를 유지시켜주었다. 물론 고객과 숭배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제자는 어땠을까? 제자가 있었을까? “아닙니다.” 컬랜더는 단정적으로 대답했다. “학생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근처도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 딱딱하고 어려웠기 때문이죠.” 상세히 살펴보자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그림은 대부분 살롱이나 개인 소장가들을 위해 그린 대형 작품들입니다.” 컬랜더가 말한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는 그의 초기 유화 습작들과 드로잉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그의 영감의 원천을 더 면밀하고 가깝게 알려줍니다.” 전시회는 그가 아카데미회원들과 함께 비공식적으로로 공부했던 초기 시절의 작품들부터 보여준다. 관람자는 아주 아카데믹한 이 스타일부터 시작하여 루소가 낭만파의 영향을 흡수하면서 더 자유로워지고 종래에는 한 화가로서 고유한 화풍에 도달한 과정을 따라갈 수 있다. 루소의 스타일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폭넓게 변화 되었지만 나무에 대한 사랑은 일생을 지속되었다.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은루소가 빈번하게 다시 찾은 장소다.----------------------------------------------------------------------------------------------------------​ 특히,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은 루소가 빈번하게 다시 찾은 장소다. 그림같은 풍경, 오래된 나무들, 그리고 유난히 구도가 잘나오는 포인트들은 그와 다른 화가들을 위해 그림의 소재들을 풍부히 제공했다. 그 당시에 풍경화 수집가들은 부유한 기업가들이었다. 그들은 인간 역사의 손때가 묻지 않은, 신화에 있을 법한 순수 자연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기차로 인해 많은 관광객이 밀려오기 전까지, 퐁텐블로 숲은 그런 장소로 여겨졌다. 루소의 초기 유화 습작들은 시야의 깔끔함과 명료함이 돋보인다. 풍부한 가을의 색감을 좋아하는, 그는 팔레트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색채를 일관되게 다루었다. 그의 붓터치는 다양하고 자유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안정적이다. 몇 개의 짙은 녹색 소용돌이를 기막히게 배치하여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듯한 풀들을 그려낸다. 그는 이 시기에 파노라마식 풍경화를 사랑했다. 그리고 강한 구도 속에 운동감과 균형감을 표현해 낸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작품이 모두 자유로우면서도 정밀하다는 점이다. 이런 특징은 그의 초기 습작들(연필, 수채, 잉크, 분필)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각각의 그림에서 그는 지극히 폭신해 보이는 군엽(群葉)과 지극히 후줄그레한 풀들 등 질감의 배치를 구현해 낸다. 낭만파는 그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1830년경부터 그의 작품들에는 극적인 분위기와 양식화된 붓터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따뜻한 안료들을 사랑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이를 사용해 학창시절처럼 고아한 풍경화를 그리기 보다는 들쑥날쑥한 바위와 폭포를 그렸다. 1829년~ 1830년 경 그린 ‘작은 폭포(캐스케이드,cascade)’ 는 음영에 덮인 수풀의 장면과 이에 대조되는 광휘로움 때문에, 그리고 눈이 즐거워 질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질감 때문에 보는 이의 숨을 막히게 한다. 튀어오르는 흰 물감은 구겨진 웨딩드레스처럼 앞으로 튀어나와 그림 속에서 유일한 광점을 형성한다. 고요한 물의 표면은 물감을 얇고 평평하게 칠해서 표현했다. ‘작은폭포’는 선사시대 바위 모습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화산활동 지역인 오베르뉴(Auvergne)에서 거의 완성되었다. 그 후 루소는 예술가들 사이에서 해변의 모습으로 유명한, 노르망디(Normandy)로 가서 6년 동안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그랜빌 해변의 보트 1831-1832년 테오도르 루소 작, 종이에 초크(개인 소장) 루소의 어두운 나날들 전시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루소의 시적 감각이 점점 어두워져 감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숲을 그냥 숲으로 느끼지 않는 것이다. 1847년에 그는 퐁텐블로 근처의 마을인 바르비종(Barbizon)에 정착했다. 바르비종에서 그는 숲과 나무라는 모티브에 더욱 강하게 몰두했고, 그를 유명하게 만든 최고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숲에 대한 대중적 문화적 상상력은 처녀성, 깊이, 불가해 등이었고 이는 역사적 변화와 현대성의 반대 의미였습니다.” 컬랜더는 말한다. “루소의 바르비종 풍경화는 이러한 생각들과는 다른 사고를 많이 보여줍니다.”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 사진, 나다(Nadar)작, 1855~1859년 경 (위키커먼스 출처) ‘퐁텐블로숲의 일몰’ 은 초현실 언저리의 평화로움 속에서 오히려 으스스함을 확실히 느끼게 해 준다. 빽빽한 나무숲이 희미해져가는 빛을 배경으로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을 둘러싸고 있다. 지평선 위에서 작열하는 하얀 타원체가 후광을 발산하는 모습을 사각의 붓놀림으로 표현했다. 전시회의 마지막 부분은 정말 놀랍다. 1860년대의 드로잉이 현대 뉴욕 만화를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펜작업(loopy pen work)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의 드로잉과 유화 스케치가 촘촘하고 두터운 기호(마크)로 이루어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수집했던 네덜란드의 동판화와 유사한 모습니다. 까다롭기는 했지만, 한 남자의 40년 세월에 관한 작은 연구들을 종합하여 초상화를 그려보았다. 그의 인생은 남들이 자신의 힘을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이 스스로 배우고 다그치며 살아온 인생이라 요약하자. 풍경 속의 사람, 1960-1865년 경, 테오도르 루소 작, 종이에 펜과 검정 잉크, 수채(개인 소장) 글 쓴이 : 윔 반 알스트(Wim Van Aalst)윔 반 알스트는 벨기에에서 활동하는 화가다.NTD Korea 편집부 : 에폭 타임즈(EPOCH TIMES) 전재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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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루소 : 엄청난 재능의 까다로운 화가(한,영)
  • [ 기사입력   2014-11-10 오후 11:16 ]

    크리스틴 린, 에폭 타임즈, 2014년 10월 8일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의 일몰,” 1848-1850년 경, 테오도르 루소 작, 종이위에 유채와 흑연, 캔버스위에 배접.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 DC) 

     

     

     

    그는 활동기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본인도 이를 알고 있었다. 오늘날 카미유 코로와 장 프랑수와 밀레와 같은 이름은 여러분이 들어본 적이 있겠지만, 테오도르 루소의 이름은 어떨지 모르겠다.

     

    루소는 1800년대의 많은 재능 있는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인상파의 전성기에 파묻혀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루소를 창시자로 보는 바르비종파는 인상파 화가들을 성장시켜주었다. 자연주의 풍경화인 바르비종파는 고전 풍경화와 인상파 그림 사이의 과도기에 등장했다.

     

    루소(1812~1867)는 일류 예술 살롱의 판단 기준에 대해, 찬반 논란이 뜨겁던 시기에 작품 활동을 했다. 끝맺음을 어떤 수준으로 해야 그림이 완성된 것인가? 거친 표현은 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순수 풍경에는 (루소의 빵과 버터 같은) 서술(narrative)이 없으며, 심지어 타당한 장르도 없다고 봐야 하는 것인가?

     

     

    파리, 세느강 너머 다리가 있는 풍경 1830-1833년 경 종이에 유채, 캔버스 배접(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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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라 대하기가 좀 어려웠다.

    그리고 아주 독립적 마인드를 가졌다.”

     

    에이미 컬랜더(Amy Kurlander), 예술사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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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9년에, 루소는 쁘리 드 롬므(Prix de Rome, 로마의 상) 장학금을 받으려 노력했지만 1심에서 탈락하였다. 그러나 그는 운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서 1830년대 초기에는, 파리 살롱(Paris Salon)의 아카데미 데 보자르 (Académie des Beaux-Arts, 미술 아카데미)의 연례 전시회에 작품이 전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1836년에는 그런 혜택도 중단되었다. 1842년이 되자 루소는 그런 일들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말자고 결정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르 그랑 레퓌제(Le Grand Refusé)”-‘거절당한 대가(大家)’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제도권에 의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평판은 그에게 (오히려) 득이 되었습니다.” 에이미 컬랜더는 말한다. 컬랜더는 현재 루소의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모건 박물 도서관(Morgan Library & Museum)의 ‘길들이지 않은 풍경(The Untamed Landscape)’ 전시회에서 객원 큐레이터를 담당하고 있다.

     

    “그는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대하기 좀 어려웠죠. 그리고 아주 독립적 마인드를 가졌습니다.” 컬랜더는 말한다. 그가 1855년경 찍은 사진을 보면 머리는 벗겨지기 시작했고 얼굴에는 수염이 났다. 두 눈은 카메라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살롱에서 무시당하던 시절에도 핵심 지지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를 옹호하고 그의 대중적 이미지를 유지시켜주었다. 물론 고객과 숭배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제자는 어땠을까? 제자가 있었을까?

     

    “아닙니다.” 컬랜더는 단정적으로 대답했다. “학생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근처도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 딱딱하고 어려웠기 때문이죠.”

     

     

    상세히 살펴보자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그림은 대부분 살롱이나 개인 소장가들을 위해 그린 대형 작품들입니다.” 컬랜더가 말한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는 그의 초기 유화 습작들과 드로잉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그의 영감의 원천을 더 면밀하고 가깝게 알려줍니다.”

     

    전시회는 그가 아카데미회원들과 함께 비공식적으로로 공부했던 초기 시절의 작품들부터 보여준다. 관람자는 아주 아카데믹한 이 스타일부터 시작하여 루소가 낭만파의 영향을 흡수하면서 더 자유로워지고 종래에는 한 화가로서 고유한 화풍에 도달한 과정을 따라갈 수 있다.

     

    루소의 스타일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폭넓게 변화 되었지만 나무에 대한 사랑은 일생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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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은

    루소가 빈번하게 다시 찾은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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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은 루소가 빈번하게 다시 찾은 장소다. 그림같은 풍경, 오래된 나무들, 그리고 유난히 구도가 잘나오는 포인트들은 그와 다른 화가들을 위해 그림의 소재들을 풍부히 제공했다.

     

    그 당시에 풍경화 수집가들은 부유한 기업가들이었다. 그들은 인간 역사의 손때가 묻지 않은, 신화에 있을 법한 순수 자연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기차로 인해 많은 관광객이 밀려오기 전까지, 퐁텐블로 숲은 그런 장소로 여겨졌다.

     

    루소의 초기 유화 습작들은 시야의 깔끔함과 명료함이 돋보인다. 풍부한 가을의 색감을 좋아하는, 그는 팔레트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색채를 일관되게 다루었다. 그의 붓터치는 다양하고 자유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안정적이다. 몇 개의 짙은 녹색 소용돌이를 기막히게 배치하여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듯한 풀들을 그려낸다. 그는 이 시기에 파노라마식 풍경화를 사랑했다. 그리고 강한 구도 속에 운동감과 균형감을 표현해 낸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작품이 모두 자유로우면서도 정밀하다는 점이다. 이런 특징은 그의 초기 습작들(연필, 수채, 잉크, 분필)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각각의 그림에서 그는 지극히 폭신해 보이는 군엽(群葉)과 지극히 후줄그레한 풀들 등 질감의 배치를 구현해 낸다.

     

    낭만파는 그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1830년경부터 그의 작품들에는 극적인 분위기와 양식화된 붓터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따뜻한 안료들을 사랑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이를 사용해 학창시절처럼 고아한 풍경화를 그리기 보다는 들쑥날쑥한 바위와 폭포를 그렸다.

     

    1829년~ 1830년 경 그린 ‘작은 폭포(캐스케이드,cascade)’ 는 음영에 덮인 수풀의 장면과 이에 대조되는 광휘로움 때문에, 그리고 눈이 즐거워 질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질감 때문에 보는 이의 숨을 막히게 한다. 튀어오르는 흰 물감은 구겨진 웨딩드레스처럼 앞으로 튀어나와 그림 속에서 유일한 광점을 형성한다. 고요한 물의 표면은 물감을 얇고 평평하게 칠해서 표현했다.

     

    ‘작은폭포’는 선사시대 바위 모습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화산활동 지역인 오베르뉴(Auvergne)에서 거의 완성되었다. 그 후 루소는 예술가들 사이에서 해변의 모습으로 유명한, 노르망디(Normandy)로 가서 6년 동안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그랜빌 해변의 보트 1831-1832년 테오도르 루소 작, 종이에 초크(개인 소장) 

     

     

     

    루소의 어두운 나날들

     

    전시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루소의 시적 감각이 점점 어두워져 감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숲을 그냥 숲으로 느끼지 않는 것이다.

     

    1847년에 그는 퐁텐블로 근처의 마을인 바르비종(Barbizon)에 정착했다. 바르비종에서 그는 숲과 나무라는 모티브에 더욱 강하게 몰두했고, 그를 유명하게 만든 최고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숲에 대한 대중적 문화적 상상력은 처녀성, 깊이, 불가해 등이었고 이는 역사적 변화와 현대성의 반대 의미였습니다.” 컬랜더는 말한다. “루소의 바르비종 풍경화는 이러한 생각들과는 다른 사고를 많이 보여줍니다.”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 사진, 나다(Nadar)작, 1855~1859년 경 (위키커먼스 출처)

     

     

     

    ‘퐁텐블로숲의 일몰’ 은 초현실 언저리의 평화로움 속에서 오히려 으스스함을 확실히 느끼게 해 준다. 빽빽한 나무숲이 희미해져가는 빛을 배경으로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을 둘러싸고 있다. 지평선 위에서 작열하는 하얀 타원체가 후광을 발산하는 모습을 사각의 붓놀림으로 표현했다.

     

    전시회의 마지막 부분은 정말 놀랍다. 1860년대의 드로잉이 현대 뉴욕 만화를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펜작업(loopy pen work)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의 드로잉과 유화 스케치가 촘촘하고 두터운 기호(마크)로 이루어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수집했던 네덜란드의 동판화와 유사한 모습니다.

     

    까다롭기는 했지만, 한 남자의 40년 세월에 관한 작은 연구들을 종합하여 초상화를 그려보았다. 그의 인생은 남들이 자신의 힘을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이 스스로 배우고 다그치며 살아온 인생이라 요약하자.

     

     

    풍경 속의 사람, 1960-1865년 경, 테오도르 루소 작, 종이에 펜과 검정 잉크, 수채(개인 소장)

     

     

    글 쓴이 : 윔 반 알스트(Wim Van Aalst)

    윔 반 알스트는 벨기에에서 활동하는 화가다.

    NTD Korea 편집부 : 에폭 타임즈(EPOCH TIMES) 전재보도

     

     


  • 글로벌 원문 링크:m.theepochtimes.com/n3/1005614-a-cantankerous-painter-of-immense-versatility
  • A Cantankerous Painter of Immense Versatility

    By Christine Lin, Epoch Times | October 8, 2014]


    “Sunset in the Forest of Fontainebleau,” circa 1848–1850, by Théodore Rousseau. Oil and graphite on paper, mounted on canvas.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NEW YORK—He was overlooked in his day and knew it. To today’s ear, names like Camille Corot and Jean-François Millet ring a bell, but what about Théodore Rousseau?

    Rousseau’s talents, like that of many talented painters in the 1800s, got overlooked in the heyday of impressionism. Ironically, impressionists stood on the shoulders of the Barbizon school, of which Rousseau is considered a founding father. The Barbizon school of naturalist landscape painting represented a transition period between classical landscape painting and the beginning of impressionism.

    Rousseau (1812–1867) worked at a time when judges at prestigious art salons were in hot debate. What level of finish makes a painting complete? Are rough representations ever acceptable? Is pure landscape devoid of narrative (Rousseau’s bread and butter) even a legitimate gen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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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 was not a sociable guy, kind of difficult, and very independent-minded."

    Amy Kurlander, art historian and cur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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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1829, Rousseau tried out for the Prix de Rome scholarship, and was eliminated in the first round of competitions. He had better luck with the Paris Salon, the annual art exhibition of the Académie des Beaux-Arts. It accepted his work in the early 1830s, but stopped being so kind after 1836. By 1842 Rousseau had decided that he didn’t want any of that game. People started calling him “Le Grand Refusé”—the great refused one.

    “He gained from having the reputation of being misunderstood by officialdom,” said independent art historian Amy Kurlander. Kurlander is the guest curator of The Untamed Landscape, an exhibit at the Morgan Library & Museum featuring Rousseau’s smaller works.

    “He was not a sociable guy, kind of difficult, and very independent-minded,” Kurlander said. A photo taken of him around 1855 shows him bearded, balding, and glaring archly at the camera.

    Yet he had critical supporters who, even when he was snubbed by the Salon, championed him and helped maintained his public image. He also had clients and admirers, for sure. Did he have students?

    “No,” Kurlander replied emphatically. “They were all afraid of him. They wouldn’t go near him because he was too crusty and difficult.”

    A Closer Look

    “We mostly know him through his large painted compositions that he painted for the Salon or private collectors,” Kurlander said. “This exhibition introduces his early oil study practice and drawing practice. It’s more intimate, closer to his original source of inspiration.”

    The show begins with Rousseau’s earlier work from the years he studied informally with academicians. One can track a clear evolution from a very academic style to a freer one as he absorbed influences from the Romantics, and came into his own as an artist.

    Though Rousseau’s style changed wildly throughout his career, one thing remained constant—he loved tr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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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Forest of Fontainebleau just outside Paris is a place that Rousseau would revisit again and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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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particular, the Forest of Fontainebleau just outside Paris is a place that Rousseau would revisit again and again. The picturesque landscape, ancient trees, and unusual vantage points yielded rich source material for him and other painters.

    Among collectors of landscapes at this time were wealthy industrialists thirsty for a mythological place representing natural purity, untouched by the course of human history. Fontainebleau was thought to be that place until railroad tracks brought throngs of tourists to it.

    Rousseau’s early oil studies are remarkable for their neatness and clarity of vision. Favoring rich autumnal hues, he attained consistency of color achieved through a limited palette. The sureness of his hand is evident in his varied and freely applied brushwork. A few well-placed swirls of deep green created grass-like windswept hair. He loved painting panoramic vistas in this period, and demonstrated his sense of balance and movement with strong compositions.

    Throughout all his work, but in the studies in particular (in pencil, watercolor, ink, or chalk), he shows freedom and precision in his mark making. In each sheet he manages to juxtapose textures, the fluffiest of foliage and the scruffiest of grasses.

    Romantic art influenced his approach to creating art. His works from around 1830 onward began taking on dramatic moods and stylized brushwork. He still liked his warm pigments, only now he applied them to jagged rocks and waterfalls rather than the lofty vistas of his student years.

    “Cascade,” painted in 1829–1830 is breathtaking for its luminosity despite being a shaded forest scene, and for the sheer amount of texture on which the eye can feast. A splash of white paint froths forth like a crumpled wedding gown, forming the only spot of light in the picture. A thin and even application of paint denotes the surface of calmer water.

    “Cascade” was likely to have been done in Auvergne, a volcanic region of France known for its prehistoric-looking rock formations. In the following six years Rousseau would live in and paint Normandy, a seaside spot popular among artists.

    Dark Days of Rousseau

    As the exhibition progresses, we see that Rousseau’s sense of poetry gets much darker, his view of the woods less literal.

    In 1847 he settled in Barbizon, a village near Fontainebleau. At Barbizon he focused more intensely on forest motifs and trees, beginning the period of his career for which he is best known.

    “The forest in the popular, cultural imagination at the time is virginal, deep, mysterious, the opposite of historical change and modernity,” Kurlander said. “There are a lot of different ways in which Rousseau’s Barbizon landscapes are informed by these ideas.”


    A photo of Theodore Rousseau by Nadar, circa 1855-1859. (Public Domain via WikiCommons)


    “Sunset in the Forest of Fontainebleau” is positively eerie in its peacefulness bordering on the surreal. A dense grove of trees frames cows grazing by the fading light. Square brushstrokes form radiating halos of the blazing white oval on the horizon line. The entire glittering twilight is made up of faded gray-browns.

    The last part of the exhibit yields the most surprises. A drawing dated 1860 features loopy pen work that looks like it was lifted straight out of a New Yorker cartoon.

    Around the same time his drawings and oil sketches tended to be composed of dense, thick marks, taking cues from Dutch engravings, which he collected.

    Together, these small studies spanning four decades paint a portrait of a man, however curmudgeonly, who constantly learned and pushed himself, no matter what the powers that be thought of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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