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의 눈물’… 대한민국 화교는 서럽다 한성화교협회 왕문영 수석부회장은 "타국 땅에서 성실하게 살아야 했기에 화교끼리는 50%는 믿고 시작한다"면서 "화교권이 형성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사진=전경림 기자) “2005년 전세계 화상대회를 유치하기 전부터 화상들로부터 한국엔 차이나타운이 없다는 지적을 받았어요. 세계 어느 곳이든 차이나타운이 있는데 왜 한국에는 없냐는 거죠. 그리고 차이나타운이 없는데 왜 화상대회를 한국에서 열려고 하냐는 거예요. 참 난감했죠.” 한성화교협회 왕문영 수석부회장이 아찔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지난 2005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화상대회는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화교자본의 국내 투자에 물꼬를 튼 계기가 됐다. 행사기간에만 8억3000만 달러의 화교자본이 유치됐고, 20여개국 3000여 명의 화상과 영향력 있는 최고경영자 20여 명이 참가해 높은 성과를 냈다. 성공적인 화상대회에도 불구하고 국내 화교들의 실제 삶은 차별의 연속이었다. 기본권 보장도 제대로 안돼 한국을 등지는 화교들이 늘고 있는 상황이다. “김대중 대통령 때 동남아 화교 자본을 한국에 유치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때 한국에 들어오는 화교들이 국내 화교에게 물어봅니다. 한국에서 살기가 어떤지. 그게 기본이거든요.” 물론 국내 화교에게서 좋은 대답이 나왔을 리 만무하다. 그동안 화교들은 한국에서 차별을 받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의무는 의무대로 이행하고 있는데, 권리는 하나도 안주어지고 있다”는 왕 부회장의 말은 한국에서 화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줬다. 상재(商才)에 있어 유대인 뺨치는 화교가 한국에서 유독 재벌은커녕 자본축적조차 하지 못한 배경에는 이 같은 ‘박해’에 가까운 차별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서 나고 자라도 ‘외국인’ 1948년 12월 제정된 한국의 국적법은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을 한국인으로 규정하는 속인주의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화교는 외국인 신분으로, 한국인이 되려면 까다로운 귀화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1960년대 들어 18살이 된 화교에게 외국인 등록을 의무화하면서 사태는 더 꼬였다.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3년(1998년 5년으로 연장)마다 거주자자격 신고를 하도록 해, 성인 화교는 화교협회를 통해 한국 법무부에 외국인등록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대만 등지로 유학을 떠났던 학생들이 제때 등록 갱신을 하지 못하고 일반 여행자로 취급돼 대만, 홍콩, 중국 등지로 옮겨다니며 이방인의 설움을 곱씹어야 했다. 영주권을 부여받은 ‘일본 한국인’ 보다 한국 화교가 더 큰 고통을 받은 셈인데, 이는 2002년 영주권 제도 실시 때까지 계속됐다. “진짜 서러움을 많이 받고 살아요. 어렸을 땐 한국하고 중국이 농구나 축구 경기를 하면 죽어라 한국을 응원했는데 중년이 되니까 진 팀을 응원하게 되고, 노년이 되니까 중국을 응원하게 돼요. 한국이 우리를 대우 해주지 않으니까 살면서 그런 감정들이 쌓여 ‘이겨라 중국아’ 하고 돼 버리는 거죠. 만약 대한민국이 화교들을 대우해 줬다면 한국 응원하던 어릴 때 감정이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 땅에서 태어나 친구들도 모두 한국인이고, 이 땅의 물과 곡식을 먹고 자랐으니까요. 물론 일본하고 경기하면 죽어라고 한국을 응원합니다(웃음).” 화교의 정치참여 또한 제한돼 있다. 화교에게는 총선·대선에 대한 선거권이 없다. 피선거권이 없는 건 당연하다. 지방자치단체 선거권이 있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화교로서는 권리를 박탈당한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부동산 소유 제한, 대출 제한, 사법고시·행정고시 제한 등은 김대중 정부 들어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화교의 삶을 위축시킨 차별이자 인권 침해였다. 2002년 영주권 자격을 얻는데 머물러 있어 사소하지만 생활에서 직접 부딪치는 차별도 많았다.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어요. 재산세, 주민세 등 모든 세금 꼬박꼬박 내는데 65세 이상이면 주어지는 지하철 무료 이용권도 못 받고, 무자녀 독거노인에게 적용되는 기초생활수급자 혜택도 못 받아요. 개인연금 가입도 안 되죠. 그나마 올해 1월 27일 장애인법이 통과됐지만 작년까지는 장애인 등록 자체가 금지 돼 있어 아무런 혜택도 없었어요. 장애인까지 차별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겁니다. 외국인들이 그래요, 대한민국이 이익집단이지 나라냐고.” 왕 부회장은 그럼에도 “한국에 생활터전이 있고, 부모님처럼 죽어도 한국에서 죽어야 한다”며 “이 땅을 배신하지 않고, 화교의 기본적인 권익을 위해 끝까지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시대 화교는 가교(架橋) 차별의 역사 속에서 화교의 주된 생활기반은 음식점이었다. “옛날엔 주로 짜장면 장사가 제일 많았다”는 왕 부회장은 “60~70년대만 해도 무역업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음식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73년 중화음식점에 쌀밥판매금지령이 내려지며 그마저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국내 화교는 중국, 대만 등 중화권과의 경제 관계 강화로 조금씩 활기를 되찾았다. 80년대 들어 화교네트워크를 이용한 중개업과 여행업으로 일부 화교는 큰돈을 벌었다. 동대문 의류상가가 발전하게 된 배경에도, 한국 관광업이 발전하게 된 배경에도 화교가 있었다. “80년대부터 대만에서 의류를 사갔는데, 동대문 시장은 영세사업이라 쉽게 믿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 화교가 중간 역할을 맡았죠. 대만 사람들은 우리를 믿고 돈을 줍니다. 동대문 상인은 못 믿죠. 우리가 물건을 받아 검품하고,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대만에 보내줬어요. 우리를 믿으니까 대만에 옷이 들어갈 수 있고, 옷장사가 잘 된 거죠. 그걸 보고 홍콩에서도 들어왔는데, 역시 우리를 믿고 돈을 맡기고 갔어요.” 화교끼리 서로 신뢰가 두터운 이유는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화교의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었다. “타국에서 억압받다 보니까 화교끼리는 서로 협조를 한다”는 왕 부회장은 “화교권이 크지 않기 때문에 소문이 빠르다”는 것도 이유로 꼽았다. “소문이 나쁘게 나면 화교사회에서 살기가 어려워요. 부모님들이 성실히 살라고 했는데 그게 유훈이고 가훈이었어요.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화교끼리 만나면 우선 50%는 믿고 시작해요. 화교권이 형성되는 거죠.” 관광업 역시 화교의 역할이 컸다. 지금도 중국을 비롯해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등지의 화교들이 국내 광광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대부분 화교 여행사에서 유치했다. 화교가 아니었다면 동남아 화교와 중국, 홍콩의 관광객을 유치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왕 부회장은 말했다. “한국도 화교를 잘 이용해야 합니다. 중화권 네트워크에 이방인이 침투해 들어가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죠. 화교 자본 유치와 화교권 국가와의 경제교류 과정에서 국내 화교가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알다시피 2002년 중국에 진출한 현대·기아차가 10년만에 중국 시장 3위 기업으로 발돋움한 것도 화교 출신 설영흥 중국사업총괄 부회장의 역할이 컸죠.” 현재 화교는 전 세계적으로 168개국에 8700만여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화교의 유동자산은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2배인 2조 달러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5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가진 기업인(화상)만 해도 15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남아 지역에서는 전체 자산의 60%, 상권의 70%를 장악할 정도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런 화교권 국가와의 경제교류 과정에서 귝내 화교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화교자본의 급부상 때문이 아니라 한국이 건강한 사회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화교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박대가 끝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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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의 눈물’… 대한민국 화교는 서럽다
  • [ 기사입력   2013-07-18 09:34:42 ]

    한성화교협회 왕문영 수석부회장은 "타국 땅에서 성실하게 살아야 했기에 화교끼리는 50%는 믿고 시작한다"면서 "화교권이 형성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사진=전경림 기자)

     

    “2005년 전세계 화상대회를 유치하기 전부터 화상들로부터 한국엔 차이나타운이 없다는 지적을 받았어요. 세계 어느 곳이든 차이나타운이 있는데 왜 한국에는 없냐는 거죠. 그리고 차이나타운이 없는데 왜 화상대회를 한국에서 열려고 하냐는 거예요. 참 난감했죠.”

     

    한성화교협회 왕문영 수석부회장이 아찔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지난 2005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화상대회는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화교자본의 국내 투자에 물꼬를 튼 계기가 됐다. 행사기간에만 8억3000만 달러의 화교자본이 유치됐고, 20여개국 3000여 명의 화상과 영향력 있는 최고경영자 20여 명이 참가해 높은 성과를 냈다.

     

    성공적인 화상대회에도 불구하고 국내 화교들의 실제 삶은 차별의 연속이었다. 기본권 보장도 제대로 안돼 한국을 등지는 화교들이 늘고 있는 상황이다.

     

    “김대중 대통령 때 동남아 화교 자본을 한국에 유치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때 한국에 들어오는 화교들이 국내 화교에게 물어봅니다. 한국에서 살기가 어떤지. 그게 기본이거든요.”

     

    물론 국내 화교에게서 좋은 대답이 나왔을 리 만무하다. 그동안 화교들은 한국에서 차별을 받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의무는 의무대로 이행하고 있는데, 권리는 하나도 안주어지고 있다”는 왕 부회장의 말은 한국에서 화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줬다. 상재(商才)에 있어 유대인 뺨치는 화교가 한국에서 유독 재벌은커녕 자본축적조차 하지 못한 배경에는 이 같은 ‘박해’에 가까운 차별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서 나고 자라도 ‘외국인’

     

    1948년 12월 제정된 한국의 국적법은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을 한국인으로 규정하는 속인주의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화교는 외국인 신분으로, 한국인이 되려면 까다로운 귀화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1960년대 들어 18살이 된 화교에게 외국인 등록을 의무화하면서 사태는 더 꼬였다.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3년(1998년 5년으로 연장)마다 거주자자격 신고를 하도록 해, 성인 화교는 화교협회를 통해 한국 법무부에 외국인등록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대만 등지로 유학을 떠났던 학생들이 제때 등록 갱신을 하지 못하고 일반 여행자로 취급돼 대만, 홍콩, 중국 등지로 옮겨다니며 이방인의 설움을 곱씹어야 했다. 영주권을 부여받은 ‘일본 한국인’ 보다 한국 화교가 더 큰 고통을 받은 셈인데, 이는 2002년 영주권 제도 실시 때까지 계속됐다.

     

    “진짜 서러움을 많이 받고 살아요. 어렸을 땐 한국하고 중국이 농구나 축구 경기를 하면 죽어라 한국을 응원했는데 중년이 되니까 진 팀을 응원하게 되고, 노년이 되니까 중국을 응원하게 돼요. 한국이 우리를 대우 해주지 않으니까 살면서 그런 감정들이 쌓여 ‘이겨라 중국아’ 하고 돼 버리는 거죠. 만약 대한민국이 화교들을 대우해 줬다면 한국 응원하던 어릴 때 감정이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 땅에서 태어나 친구들도 모두 한국인이고, 이 땅의 물과 곡식을 먹고 자랐으니까요. 물론 일본하고 경기하면 죽어라고 한국을 응원합니다(웃음).”

     

    화교의 정치참여 또한 제한돼 있다. 화교에게는 총선·대선에 대한 선거권이 없다. 피선거권이 없는 건 당연하다. 지방자치단체 선거권이 있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화교로서는 권리를 박탈당한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부동산 소유 제한, 대출 제한, 사법고시·행정고시 제한 등은 김대중 정부 들어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화교의 삶을 위축시킨 차별이자 인권 침해였다. 2002년 영주권 자격을 얻는데 머물러 있어 사소하지만 생활에서 직접 부딪치는 차별도 많았다.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어요. 재산세, 주민세 등 모든 세금 꼬박꼬박 내는데 65세 이상이면 주어지는 지하철 무료 이용권도 못 받고, 무자녀 독거노인에게 적용되는 기초생활수급자 혜택도 못 받아요. 개인연금 가입도 안 되죠. 그나마 올해 1월 27일 장애인법이 통과됐지만 작년까지는 장애인 등록 자체가 금지 돼 있어 아무런 혜택도 없었어요. 장애인까지 차별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겁니다. 외국인들이 그래요, 대한민국이 이익집단이지 나라냐고.”

     

    왕 부회장은 그럼에도 “한국에 생활터전이 있고, 부모님처럼 죽어도 한국에서 죽어야 한다”며 “이 땅을 배신하지 않고, 화교의 기본적인 권익을 위해 끝까지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시대 화교는 가교(架橋)

     

    차별의 역사 속에서 화교의 주된 생활기반은 음식점이었다. “옛날엔 주로 짜장면 장사가 제일 많았다”는 왕 부회장은 “60~70년대만 해도 무역업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음식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73년 중화음식점에 쌀밥판매금지령이 내려지며 그마저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국내 화교는 중국, 대만 등 중화권과의 경제 관계 강화로 조금씩 활기를 되찾았다. 80년대 들어 화교네트워크를 이용한 중개업과 여행업으로 일부 화교는 큰돈을 벌었다. 동대문 의류상가가 발전하게 된 배경에도, 한국 관광업이 발전하게 된 배경에도 화교가 있었다.

     

    “80년대부터 대만에서 의류를 사갔는데, 동대문 시장은 영세사업이라 쉽게 믿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 화교가 중간 역할을 맡았죠. 대만 사람들은 우리를 믿고 돈을 줍니다. 동대문 상인은 못 믿죠. 우리가 물건을 받아 검품하고,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대만에 보내줬어요. 우리를 믿으니까 대만에 옷이 들어갈 수 있고, 옷장사가 잘 된 거죠. 그걸 보고 홍콩에서도 들어왔는데, 역시 우리를 믿고 돈을 맡기고 갔어요.”

     

    화교끼리 서로 신뢰가 두터운 이유는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화교의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었다. “타국에서 억압받다 보니까 화교끼리는 서로 협조를 한다”는 왕 부회장은 “화교권이 크지 않기 때문에 소문이 빠르다”는 것도 이유로 꼽았다.

     

    “소문이 나쁘게 나면 화교사회에서 살기가 어려워요. 부모님들이 성실히 살라고 했는데 그게 유훈이고 가훈이었어요.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화교끼리 만나면 우선 50%는 믿고 시작해요. 화교권이 형성되는 거죠.”

     

    관광업 역시 화교의 역할이 컸다. 지금도 중국을 비롯해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등지의 화교들이 국내 광광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대부분 화교 여행사에서 유치했다. 화교가 아니었다면 동남아 화교와 중국, 홍콩의 관광객을 유치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왕 부회장은 말했다.

     

    “한국도 화교를 잘 이용해야 합니다. 중화권 네트워크에 이방인이 침투해 들어가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죠. 화교 자본 유치와 화교권 국가와의 경제교류 과정에서 국내 화교가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알다시피 2002년 중국에 진출한 현대·기아차가 10년만에 중국 시장 3위 기업으로 발돋움한 것도 화교 출신 설영흥 중국사업총괄 부회장의 역할이 컸죠.”

     

    현재 화교는 전 세계적으로 168개국에 8700만여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화교의 유동자산은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2배인 2조 달러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5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가진 기업인(화상)만 해도 15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남아 지역에서는 전체 자산의 60%, 상권의 70%를 장악할 정도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런 화교권 국가와의 경제교류 과정에서 귝내 화교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화교자본의 급부상 때문이 아니라 한국이 건강한 사회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화교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박대가 끝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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