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충칭 솽차오서 격렬시위, 사망자 발생 권익수호에 나선 충칭 솽차오 민중들이 경찰과 맞서고 있다. (인터넷 이미지) 최근 충칭의 집단항의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여파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중앙위원회에서 파견돼 보시라이 업무를 대신 맡은 장더장(張德江)은 심각한 곤란에 처해 대응이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완성(萬盛) 시위 사건이 아직 끝날 조짐을 보이지 않은 가운데 솽차오(雙橋) 민중의 항의시위가 끊임없이 확대되면서 당국의 진압방법도 점점 강경해져 민중들이 더욱 큰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충칭시는 지난 2월, 전 공안국장이자 보시라이의 측근이었던 왕리쥔이 미 영사관으로 도망친 이후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지주민의 폭력저항 운동이 더욱 커지면서 곧이어 18대 당대회를 맞이하는 중공은 다시금 세계 언론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보시라이가 중시한 솽차오, 문제 잇따라 보시라이가 실각한 후, 정치국 위원 장더장을 신속하게 충칭으로 파견했지만 장더장이 보시라이가 남겨놓은 수많은 문제점을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현재 최대의 관건이다.충칭시 완성시민의 권리수호 운동이 중공의 폭력진압에 실현되지 못한 상황에서 최근 또다시 다쭈신구(大足新區) 솽차오 시민의 권익수호 운동이 폭발했다.현지 시민에 따르면, 2011년 말 솽차오구는 훙옌 중형자동차공장이 장베이구(江北區)로 이전된 후, 행정구역이 철폐되고 다쭈현과 합병해 다쭈신구가 됐다. 솽차오구의 이름도 솽차오 경제개발특구로 바꿨다.시민들은 자신들의 요구사항과 약속이행을 요구했지만, 당국은 책임을 떠넘기며 아무런 회답도 주지 않았다.다쭈신구와 충칭시는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했고, 이미 행정구역상 사라진 솽치우구에 일을 전가시키기까지 했다. 이렇게 책임회피에 급급한 동안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농경지를 잃은 농민들이었다. 농민의 심각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자 결국 농민들의 집단 권리수호 운동이 폭발하고 말았다. 민중시위에 장더장 무력 진압 지시2012년 6월 5일부터 7일까지 다쭈신구는 국내외 투자유치를 위해 3일간 ‘제6회 다쭈오금박람회’를 개최했다.소식통에 따르면, 5일 개막식과 7일 폐막식에 중앙과 시급 간부가 참석한다는 소식에 솽차오 농민들은 다유로(大郵路)에 장애물을 설치해 막아서 그 일대 교통을 마비시켰다. 시민들은 길을 지나던 고위간부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며 수년간 끌어온 각종 문제를 해결하고 과거에 약속한 민생복리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권익수호에 나선 충칭 솽차오 민중들이 경찰과 맞서고 있다. (인터넷 이미지)장더장은 충칭에 도착한 이후 충칭의 뿌리깊은 관료사회와 난립하는 각 파벌들을 발견했다. 그래서 57명의 국장급 간부를 외부에서 뽑아왔지만 여전히 충칭을 안정시키기 어려웠다.이런 상황에서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솽차오 농민들의 권익수호 운동이 터지자 분노한 장더장은 무력과 폭력탄압을 동원해 상황을 해결하려 했다. 현지 관계자에 따르면, 충칭시 책임자가 긴급명령을 내려 융촨(永川), 다쭈, 룽창(榮昌) 등 구•현의 공안, 진압경찰, 무장경찰, 도시관리, 보안 수천 명을 동원해 진압장비와 전기봉 등으로 집회에 참여한 농민들을 구타했다. 폭력진압을 당한 농민들은 산과 들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사건은 여러 명이 사망한 유혈사태로 번졌고 폭력진압에 부상당한 1천여 농민들은 융촨 충칭시 제2인민병원, 룽창현 인민병원, 다쭈구 인민병원, 다쭈구 룽수이 제2인민병원으로 후송돼 긴급치료를 받았다.솽차오, 파업으로 농민 권익수호 성원현지인들은 솽차오의 집단 시위사건이 완성구 때보다 훨씬 커졌다고 밝혔다. 현재 솽차오의 각계 계층은 긴급하게 인력을 동원해 파업에 나서고 권리수호에 나선 농민들을 지지하고 있다. 도로 교통이 장기간 마비되면서 사태는 더욱 확산됐다.과거 생기가 넘치고 번화한 도시였던 솽루진(雙路鎮)은 더 이상 활기를 잃고 음침한 도시가 됐다. 군경과 국안요원, 사복경찰, 스파이가 사방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때문이다.6월 7일과 8일 양일 동안 충칭 완성 민중들은 ‘산책 항의’를 벌이다 경찰의 폭력진압을 당했다. 양측이 충돌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체포 당했다. 심지어 경찰들이 서로 구타하는 혼란한 국면이 나타나기도 했다.더 큰 충돌 발생할 가능성 있어현재 충칭 완성, 솽차오 시민들의 권익수호는 폭력진압을 당해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현지인들은 충칭 민중들의 첫 번째 폭력저항, 권익수호 활동은 중공의 격렬한 탄압을 당했지만, 두 번째는 오히려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밝혔다. 한 현지 주민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군경이 잔혹한 수단을 통해 군중을 구타했으며, 안정유지를 구실로 한 당국의 무차별적인 폭력은 새로운 인명 피해를 낳았다고 전했다. 솽차오구 폭동과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결국 여러 명의 민중이 목숨을 잃었다.또 다른 현지인은 “당국의 잔혹한 진압으로 솽차오 민중들은 크게 분노했고, 민중의 분노는 경찰의 악행으로 더욱 커졌다. 대부분 민중들은 뜨거운 피와 정의감이 살아나 극악무도한 ‘살인자’에게 정의로운 몽둥이를 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하거나 나약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장더장, 18대 상무위원 진입 힘들 수도 보시라이가 낙마한 후 충칭에 입성한 장더장은 보시라이가 충칭에 남겨놓은 관계, 민간, 사회 곳곳의 문제를 해결해 중앙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이를 18대 상무위원에 진입하는 발판으로 삼으려 했지만, 생각치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외부에서는 또 다른 견해를 나타냈다. 장더장은 자신의 인맥을 등용해 후진타오의 노여움을 사길 원치 않았고, 최근 안정적인 권력을 장악한 후진타오와 더욱 가까워지면서 현재 세력을 잃은 저우융캉과도 사이가 벌어지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중공의 각 파벌과 소위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충칭의 보시라이-왕리쥔 세력은 적지 않았고 뿌리가 상당히 깊었다. 여기에 충칭의 집단 권익수호, 폭력저항 운동이 상당히 거세지자, 장더장과 해당 관료들도 사태를 해결하지 못했고 궁지에 몰린 장더장은 할 수 없이 안정유지를 위한 폭력을 동원했다는 의견이다.2012년 4월 19일 오전, 충칭 완성구의 수많은 민중들은 대규모 항의시위를 일으켜 보시라이의 완성과 치장(綦江) 합병에 불만을 나타냈다. 충칭 당국은 1천 명의 경찰을 동원해 이를 무력 진압했고, 양측은 대규모 충돌을 일으켰다.한달 후인 5월 21일부터 완성구 민중들은 전략을 바꿔 광장에 ‘산책’하는 형식으로 항의와 불만을 나타냈다. 하지만 공포를 느낀 당국은 경찰력을 동원해 사람들을 쫓아내고 폭력을 동원해 사람들을 체포했다.6월 7일 완성에서는 또 다시 민중과 경찰이 충돌을 일으켰다. 당일 저녁 ‘산책’을 통해 항의하던 수만 명의 민중들은 돌아오는 길에 경찰의 체포와 폭력적인 공격을 당했다. 또한 경찰은 대량의 최루탄을 발사했으며, 건물 위에 있던 주민들을 향해 발사하기까지 했다.이와 동시에 6월 6일 솽차오에서는 더욱 격렬한 집단 폭력저항 사건이 발생했다.장더장은 무력진압으로 충칭을 더 깊은 수렁에 더욱 빠져들게 했다. 외부에서는 그가 18대 당대회에서 순조롭게 상무위원에 진입하기 힘들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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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독] 충칭 솽차오서 격렬시위, 사망자 발생
    • [ 기사입력   2012-06-19 13:19:14 ]

      권익수호에 나선 충칭 솽차오 민중들이 경찰과 맞서고 있다. (인터넷 이미지)

       

      최근 충칭의 집단항의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여파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중앙위원회에서 파견돼 보시라이 업무를 대신 맡은 장더장(張德江)은 심각한 곤란에 처해 대응이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완성(萬盛) 시위 사건이 아직 끝날 조짐을 보이지 않은 가운데 솽차오(雙橋) 민중의 항의시위가 끊임없이 확대되면서 당국의 진압방법도 점점 강경해져 민중들이 더욱 큰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충칭시는 지난 2월, 전 공안국장이자 보시라이의 측근이었던 왕리쥔이 미 영사관으로 도망친 이후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지주민의 폭력저항 운동이 더욱 커지면서 곧이어 18대 당대회를 맞이하는 중공은 다시금 세계 언론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보시라이가 중시한 솽차오, 문제 잇따라


      보시라이가 실각한 후, 정치국 위원 장더장을 신속하게 충칭으로 파견했지만 장더장이 보시라이가 남겨놓은 수많은 문제점을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현재 최대의 관건이다.


      충칭시 완성시민의 권리수호 운동이 중공의 폭력진압에 실현되지 못한 상황에서 최근 또다시 다쭈신구(大足新區) 솽차오 시민의 권익수호 운동이 폭발했다.


      현지 시민에 따르면, 2011년 말 솽차오구는 훙옌 중형자동차공장이 장베이구(江北區)로 이전된 후, 행정구역이 철폐되고 다쭈현과 합병해 다쭈신구가 됐다. 솽차오구의 이름도 솽차오 경제개발특구로 바꿨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요구사항과 약속이행을 요구했지만, 당국은 책임을 떠넘기며 아무런 회답도 주지 않았다.


      다쭈신구와 충칭시는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했고, 이미 행정구역상 사라진 솽치우구에 일을 전가시키기까지 했다. 이렇게 책임회피에 급급한 동안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농경지를 잃은 농민들이었다. 농민의 심각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자 결국 농민들의 집단 권리수호 운동이 폭발하고 말았다.


      민중시위에 장더장 무력 진압 지시


      2012년 6월 5일부터 7일까지 다쭈신구는 국내외 투자유치를 위해 3일간 ‘제6회 다쭈오금박람회’를 개최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5일 개막식과 7일 폐막식에 중앙과 시급 간부가 참석한다는 소식에 솽차오 농민들은 다유로(大郵路)에 장애물을 설치해 막아서 그 일대 교통을 마비시켰다. 시민들은 길을 지나던 고위간부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며 수년간 끌어온 각종 문제를 해결하고 과거에 약속한 민생복리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권익수호에 나선 충칭 솽차오 민중들이 경찰과 맞서고 있다. (인터넷 이미지)


      장더장은 충칭에 도착한 이후 충칭의 뿌리깊은 관료사회와 난립하는 각 파벌들을 발견했다. 그래서 57명의 국장급 간부를 외부에서 뽑아왔지만 여전히 충칭을 안정시키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솽차오 농민들의 권익수호 운동이 터지자 분노한 장더장은 무력과 폭력탄압을 동원해 상황을 해결하려 했다.

      현지 관계자에 따르면, 충칭시 책임자가 긴급명령을 내려 융촨(永川), 다쭈, 룽창(榮昌) 등 구•현의 공안, 진압경찰, 무장경찰, 도시관리, 보안 수천 명을 동원해 진압장비와 전기봉 등으로 집회에 참여한 농민들을 구타했다.

      폭력진압을 당한 농민들은 산과 들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사건은 여러 명이 사망한 유혈사태로 번졌고 폭력진압에 부상당한 1천여 농민들은 융촨 충칭시 제2인민병원, 룽창현 인민병원, 다쭈구 인민병원, 다쭈구 룽수이 제2인민병원으로 후송돼 긴급치료를 받았다.


      솽차오, 파업으로 농민 권익수호 성원


      현지인들은 솽차오의 집단 시위사건이 완성구 때보다 훨씬 커졌다고 밝혔다. 현재 솽차오의 각계 계층은 긴급하게 인력을 동원해 파업에 나서고 권리수호에 나선 농민들을 지지하고 있다. 도로 교통이 장기간 마비되면서 사태는 더욱 확산됐다.


      과거 생기가 넘치고 번화한 도시였던 솽루진(雙路鎮)은 더 이상 활기를 잃고 음침한 도시가 됐다. 군경과 국안요원, 사복경찰, 스파이가 사방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때문이다.


      6월 7일과 8일 양일 동안 충칭 완성 민중들은 ‘산책 항의’를 벌이다 경찰의 폭력진압을 당했다. 양측이 충돌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체포 당했다. 심지어 경찰들이 서로 구타하는 혼란한 국면이 나타나기도 했다.


      더 큰 충돌 발생할 가능성 있어


      현재 충칭 완성, 솽차오 시민들의 권익수호는 폭력진압을 당해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현지인들은 충칭 민중들의 첫 번째 폭력저항, 권익수호 활동은 중공의 격렬한 탄압을 당했지만, 두 번째는 오히려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밝혔다.

      한 현지 주민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군경이 잔혹한 수단을 통해 군중을 구타했으며, 안정유지를 구실로 한 당국의 무차별적인 폭력은 새로운 인명 피해를 낳았다고 전했다. 솽차오구 폭동과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결국 여러 명의 민중이 목숨을 잃었다.


      또 다른 현지인은 “당국의 잔혹한 진압으로 솽차오 민중들은 크게 분노했고, 민중의 분노는 경찰의 악행으로 더욱 커졌다. 대부분 민중들은 뜨거운 피와 정의감이 살아나 극악무도한 ‘살인자’에게 정의로운 몽둥이를 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하거나 나약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장더장, 18대 상무위원 진입 힘들 수도


      보시라이가 낙마한 후 충칭에 입성한 장더장은 보시라이가 충칭에 남겨놓은 관계, 민간, 사회 곳곳의 문제를 해결해 중앙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이를 18대 상무위원에 진입하는 발판으로 삼으려 했지만, 생각치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외부에서는 또 다른 견해를 나타냈다. 장더장은 자신의 인맥을 등용해 후진타오의 노여움을 사길 원치 않았고, 최근 안정적인 권력을 장악한 후진타오와 더욱 가까워지면서 현재 세력을 잃은 저우융캉과도 사이가 벌어지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중공의 각 파벌과 소위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충칭의 보시라이-왕리쥔 세력은 적지 않았고 뿌리가 상당히 깊었다. 여기에 충칭의 집단 권익수호, 폭력저항 운동이 상당히 거세지자, 장더장과 해당 관료들도 사태를 해결하지 못했고 궁지에 몰린 장더장은 할 수 없이 안정유지를 위한 폭력을 동원했다는 의견이다.


      2012년 4월 19일 오전, 충칭 완성구의 수많은 민중들은 대규모 항의시위를 일으켜 보시라이의 완성과 치장(綦江) 합병에 불만을 나타냈다. 충칭 당국은 1천 명의 경찰을 동원해 이를 무력 진압했고, 양측은 대규모 충돌을 일으켰다.


      한달 후인 5월 21일부터 완성구 민중들은 전략을 바꿔 광장에 ‘산책’하는 형식으로 항의와 불만을 나타냈다. 하지만 공포를 느낀 당국은 경찰력을 동원해 사람들을 쫓아내고 폭력을 동원해 사람들을 체포했다.


      6월 7일 완성에서는 또 다시 민중과 경찰이 충돌을 일으켰다. 당일 저녁 ‘산책’을 통해 항의하던 수만 명의 민중들은 돌아오는 길에 경찰의 체포와 폭력적인 공격을 당했다. 또한 경찰은 대량의 최루탄을 발사했으며, 건물 위에 있던 주민들을 향해 발사하기까지 했다.


      이와 동시에 6월 6일 솽차오에서는 더욱 격렬한 집단 폭력저항 사건이 발생했다.


      장더장은 무력진압으로 충칭을 더 깊은 수렁에 더욱 빠져들게 했다. 외부에서는 그가 18대 당대회에서 순조롭게 상무위원에 진입하기 힘들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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