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파룬궁 창시인 암살 기도 내막 2012년 5월 13일 뉴욕에서 열린 파룬따파 수련심득교류회 장면(사진=다이빙) 중공 前 총서기 장쩌민은 1999년 7월부터 독단적으로 파룬궁 탄압을 결정하고 전체 국가기구를 총동원해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특히 파룬궁 탄압을 전문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나치의 게슈타포와 유사한 초헌법적 조직인 ‘610 사무실’을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파룬궁에 대한 중국민중들의 증오심을 부추기기 위해 2001년 1월 23일에는 소위 ‘톈안먼분신자살 사기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중국 공안부의 조사에 따르면 1999년 초 중국에서는 적어도 7000만 명 이상이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었으며 그 숫자가 공산당 전체 당원수를 초과했다. 당시 파룬궁을 수련하던 사람들 중에는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의 가족을 비롯해 각 부처 부장 등 고위 관리는 물론 군부지도자 및 재계 인사 등 다양하게 분포돼 있었다,파룬궁 창시인 암살 미수 사건장쩌민은 파룬궁에 대한 질투심과 두려움으로 과거 여러 차례 파룬궁 창시인의 암살을 시도 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대만에서의 암살 기도 실패 1999년 장쩌민과 그 추종자들은 다른 국가에 대해 파룬궁 창시인을 인도해줄 경우 5억불 제공과 최혜국 대우를 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지만 실패에 그쳤다. 이에 장쩌민은 특무(간첩)부서에 비밀리에 암살령을 내렸고 국가안전부와 총참모부가 연합으로 한 특수팀을 조직해 전문적으로 파룬궁 창시인의 행방을 추적했다. 또한 요원을 훈련시켜 파룬궁 창시인에 대한 암살을 준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장쩌민 일당은 많은 남녀 특무들을 파견했다고 한다. 특히 여자 특무를 파룬궁 수련자로 가장시켜 만나는 사람마다 “사부님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파룬궁 창시인의 거처를 묻곤 했다. 이들은 심지어 각종 파룬궁 단체 활동에 참가하는 방식으로 수련자들 속에서 암약했지만 결국 음모를 이루진 못했다.2000년 12월초 언론에서는 ‘파룬궁 창시인이 대만에서 강연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대만 파룬궁 책임자의 대담을 통해 실렸다. 12월 18일 대만 자유시보는 대만 당국이 파룬궁 창시인의 대만 방문을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장쩌민 일당은 이를 노리고 비밀리에 특수팀을 대만에 파견했다. 또 대만 흑사회 조직과 비밀리에 접촉해 거액의 돈으로 이들을 매수하고 파룬궁 창시인이 대만에 와서 강연할 때 암살을 시도하려 했다.그러나 리훙쯔 선생은 “대만 당국에 압력을 가중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대만 방문을 취소했고 결국 암살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12월 20일 본지는 이와 관련 대만 파룬궁 대변인 훙지훙(洪吉弘)씨를 취재한 바 있는데 훙씨는 “리훙쯔 선생께서는 이러한 세태에 대해 비탄하셨으며, 양안관계를 고려해 대만정부에 부담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때문에 이번에 대만에 오지 않기로 결정하셨다”고 밝혔다.리훙쯔 선생이 대만 방문 일정을 취소하자 미국의 장쩌민 계 사이트에서는 “대만 파룬궁 핵임 인사가 리훙쯔가 대만 심득교류회 행사에 참석해 강연을 한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고 선전했다.홍콩에서의 암살 기도 실패 2001년 홍콩 파룬궁 대회를 앞두고 장쩌민의 책상위에 비밀정보가 올라왔다. 대체적인 내용은 파룬궁이 1월 13일부터 14일까지 홍콩에서 행사를 여는데 창시인이 14일 강연을 한다는 것이다. 장쩌민은 이 보고를 본 후 즉각 비밀명령을 하달해 이번 기회를 이용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파룬궁 창시인을 제거하도록 지시했다.이에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국가안전부 및 공안부가 연합해 즉각 1.14 암살행동계획을 만들고 홍콩에 들어가 비밀행동을 전개했다. 당시 장쩌민은 이 암살계획에 대해 아주 득의만만했다고 한다.1.14 계획을 실시하는 중에 중공의 모든 동남아 및 북미 등지의 해외정보기구가 비상상태에 돌입했으며, 아울러 홍콩과 마카오에서는 거의 모든 흑사회 집단이 중공의 협박과 회유에 의해 암살계획에 가담됐다. 왜냐하면 당시 중공의 계획은 홍콩과 마카오지역 흑사회 집단이 단독으로 암살하는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당시 홍콩 도처에서는 살기가 등등한 분위기였다.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회 전날 파룬궁 창시인은 갑작스레 일정을 취소했고 단지 1월 14일 행사에서 대리인을 통해 축사만 발표했다. 결국 장쩌민이 자신만만해하던 암살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장쩌민은 당시 1.14 계획이 중도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캐나다에서의 암살 기도 실패2002년 캐나다 국회의원이 캐나다, 중국 및 전 인류에 대해 파룬궁이 특별한 공헌을 했다고 찬사를 보내며 파룬궁 전파 10주년을 맞아 5월 18일부터 19일까지 토론토 대학에서 파룬궁 창시인을 초청해 강연을 요청했다. 이 소식을 중공 측이 탐지한 후 중공은 또 파룬궁 창시인에 대한 암살계획을 준비했다.하지만 참가 인원이 너무 많아 원래 5월 18일 토론토 대학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5회 캐나다 파룬따파 수련심득교류회’는 갑자기 장소를 변경해 2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쉐라톤 호텔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대회의실은 가득 찼고 입장권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장쩌민이 파견한 요원들과 매수된 흑사회 조직원은 갑작스런 일정 변경에 자신들의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5월 19일 오전 그들은 조를 나눠 행동에 돌입했다. 일부는 행사장 주변을 맴돌았고 일부는 자신들이 대륙과 홍콩에서 온 파룬궁 수련자라고 속이고 회의장에 들어가 맨 앞줄에 앉기도 했다.그러나 그날 심득교류회는 이례적으로 회의가 거의 끝날 무렵 파룬궁 창시인의 축사만 발표됐다. 결국 암살을 위해 잠입한 요원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켜 행사에 참가한 격이 됐으며, 파룬궁을 수련하는 수련자들의 진실한 체험담을 듣고 파룬궁을 제대로 이해하고 진상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특히 이날 의미심장했던 것은 행사가 끝날 무렵 무대 위로 리훙쯔 선생에게 전달할 화환이 올려졌다는 점이다.일반적으로 행사를 진행하는 사회자는 화환을 받을 사람이 회의장에 있는지 여부를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화환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파룬궁 수련자들이 단상위로 화환을 올렸다는 것은 모든 행사 참가자들에게 리훙쯔 선생께 헌화한다는 것을 분명히 공개한 모양이 되었다. 이것은 결국 리훙쯔 선생이 당시 현장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파룬궁 수련자가 된 비밀요원들1997년 뤄간은 공안부에 지시를 내려 전국적으로 파룬궁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뤄간은 여러 가지 증거를 수집해 파룬궁을 ‘사교’로 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전국 공안청과 공안국은 충분한 조사를 거쳤지만 “(파룬궁에 대해)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1998년 7월 공안부 1국에서 ‘파룬궁에 대한 조사를 전개할 것에 관한 통지’를 발표해 파룬궁에 대해 미리 죄를 정하고 활동상황을 파악해 위법 증거를 수집하도록 했다.뤄간이 발표한 문서는 미리 죄를 단정하고 나중에 증거를 찾는 모함의 성격이 분명했다. 당시 적지 않은 공안, 통일전선부와 비밀요원들이 파룬궁 연공장에 잠입해 공법을 배우고 수련지침서인 ‘전법륜’을 학습했다. 그러나 수련자들의 모든 활동은 전부 투명했고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웠으며 돈을 받거나 하는 문제점이 없었다. 많은 비밀요원들이 이런 점을 보면서 파룬궁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고 도리어 수련에 참여하여 확고한 수련자가 되었다. 뤄간을 놀라게 한 것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보고자료 중에서 파룬궁 수련자의 죄를 수집한 것은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점이다.뤄간은 또 공안부에서 기공을 담당한 사람마저 모두 기공을 잘 이해하고 많은 이들이 스스로 기공을 연마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몹시 초조해졌다. 뤄간은 이에 1996년 공안부를 개편해 원래 기공업무를 담당하던 사람들을 모두 전출시키는 한편 파룬궁 탄압을 위한 토대를 다졌다. 해외에서도 많은 장쩌민 계의 특무들이 파룬궁 수련자 내부에 잠입해 파룬궁에 관한 정보를 탐지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여기서는 한 가지 사례만 들어본다.딩커(丁柯)라는 중국인은 한때 중국국가안전부에서 근무했고 광명일보 기자의 신분으로 미국에 파견됐다. 그는 신문 기자의 신분으로 국가안전부를 대신해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했다.그는 198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후 당시 중공중앙 조사부에서 한 달간 훈련을 거친 후 해외로 파견됐다. 그가 요구받은 것은 다양한 인물들을 접촉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딩커는 1999년 8,9월부터 파룬궁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CNN 방송 및 일부 서방 매체에서 톈안먼 광장과 베이징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가부좌하고 평화적으로 탄압에 항의한다고 보도하는 것을 보고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그는 “나는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평화적으로 조용히 연공하고 가부좌하고 있음에도 경찰의 난폭한 탄압과 구타를 당하는 것을 보았다. 당시 이런 모습을 보고 자신의 신앙을 위해 이런 학대를 받는 파룬궁 수련자들에 대해 몹시 동정하게 되었다. 1989년 6.4 톈안먼 사태 이후 장쩌민은 수많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1999년 톈안먼광장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수호하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 중공의 폭력에 저항한 것은 나를 크게 고무시켰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진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파룬궁은 일종의 기공으로 중국 전통의 우수한 쿵푸라고만 여겼다. 왜냐하면 나도 다른 기공을 연마한 적이 있기 때문에 기공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그는 또 “파룬궁에서 받은 가장 깊은 인상은 그들을 통해 진정으로 수련에서 요구하는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변화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자신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사회에 대해서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고 밝혔다. 딩커는 이때부터 자신의 특무 임무를 포기하고 중문과 영문 사이트에 파룬궁의 억울함을 변론하기 시작했다. 파룬궁을 음해하는 임무를 띠고 해외에 나왔다가 진실한 면을 보고 오히려 파룬궁의 편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해외에서는 이런 사례들이 부지기수로 많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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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쩌민, 파룬궁 창시인 암살 기도 내막
    • [ 기사입력   2012-06-09 12:17:41 ]

      2012년 5월 13일 뉴욕에서 열린 파룬따파 수련심득교류회 장면(사진=다이빙)

       

      중공 前 총서기 장쩌민은 1999년 7월부터 독단적으로 파룬궁 탄압을 결정하고 전체 국가기구를 총동원해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특히 파룬궁 탄압을 전문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나치의 게슈타포와 유사한 초헌법적 조직인 ‘610 사무실’을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파룬궁에 대한 중국민중들의 증오심을 부추기기 위해 2001년 1월 23일에는 소위 ‘톈안먼분신자살 사기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중국 공안부의 조사에 따르면 1999년 초 중국에서는 적어도 7000만 명 이상이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었으며 그 숫자가 공산당 전체 당원수를 초과했다. 당시 파룬궁을 수련하던 사람들 중에는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의 가족을 비롯해 각 부처 부장 등 고위 관리는 물론 군부지도자 및 재계 인사 등 다양하게 분포돼 있었다,


      파룬궁 창시인 암살 미수 사건


      장쩌민은 파룬궁에 대한 질투심과 두려움으로 과거 여러 차례 파룬궁 창시인의 암살을 시도 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대만에서의 암살 기도 실패


      1999년 장쩌민과 그 추종자들은 다른 국가에 대해 파룬궁 창시인을 인도해줄 경우 5억불 제공과 최혜국 대우를 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지만 실패에 그쳤다. 이에 장쩌민은 특무(간첩)부서에 비밀리에 암살령을 내렸고 국가안전부와 총참모부가 연합으로 한 특수팀을 조직해 전문적으로 파룬궁 창시인의 행방을 추적했다. 또한 요원을 훈련시켜 파룬궁 창시인에 대한 암살을 준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장쩌민 일당은 많은 남녀 특무들을 파견했다고 한다. 특히 여자 특무를 파룬궁 수련자로 가장시켜 만나는 사람마다 “사부님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파룬궁 창시인의 거처를 묻곤 했다. 이들은 심지어 각종 파룬궁 단체 활동에 참가하는 방식으로 수련자들 속에서 암약했지만 결국 음모를 이루진 못했다.


      2000년 12월초 언론에서는 ‘파룬궁 창시인이 대만에서 강연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대만 파룬궁 책임자의 대담을 통해 실렸다. 12월 18일 대만 자유시보는 대만 당국이 파룬궁 창시인의 대만 방문을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장쩌민 일당은 이를 노리고 비밀리에 특수팀을 대만에 파견했다. 또 대만 흑사회 조직과 비밀리에 접촉해 거액의 돈으로 이들을 매수하고 파룬궁 창시인이 대만에 와서 강연할 때 암살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리훙쯔 선생은 “대만 당국에 압력을 가중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대만 방문을 취소했고 결국 암살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12월 20일 본지는 이와 관련 대만 파룬궁 대변인 훙지훙(洪吉弘)씨를 취재한 바 있는데 훙씨는 “리훙쯔 선생께서는 이러한 세태에 대해 비탄하셨으며, 양안관계를 고려해 대만정부에 부담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때문에 이번에 대만에 오지 않기로 결정하셨다”고 밝혔다.


      리훙쯔 선생이 대만 방문 일정을 취소하자 미국의 장쩌민 계 사이트에서는 “대만 파룬궁 핵임 인사가 리훙쯔가 대만 심득교류회 행사에 참석해 강연을 한다고 거짓말을 퍼뜨렸다”고 선전했다.


      홍콩에서의 암살 기도 실패


      2001년 홍콩 파룬궁 대회를 앞두고 장쩌민의 책상위에 비밀정보가 올라왔다. 대체적인 내용은 파룬궁이 1월 13일부터 14일까지 홍콩에서 행사를 여는데 창시인이 14일 강연을 한다는 것이다. 장쩌민은 이 보고를 본 후 즉각 비밀명령을 하달해 이번 기회를 이용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파룬궁 창시인을 제거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국가안전부 및 공안부가 연합해 즉각 1.14 암살행동계획을 만들고 홍콩에 들어가 비밀행동을 전개했다. 당시 장쩌민은 이 암살계획에 대해 아주 득의만만했다고 한다.


      1.14 계획을 실시하는 중에 중공의 모든 동남아 및 북미 등지의 해외정보기구가 비상상태에 돌입했으며, 아울러 홍콩과 마카오에서는 거의 모든 흑사회 집단이 중공의 협박과 회유에 의해 암살계획에 가담됐다. 왜냐하면 당시 중공의 계획은 홍콩과 마카오지역 흑사회 집단이 단독으로 암살하는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당시 홍콩 도처에서는 살기가 등등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회 전날 파룬궁 창시인은 갑작스레 일정을 취소했고 단지 1월 14일 행사에서 대리인을 통해 축사만 발표했다. 결국 장쩌민이 자신만만해하던 암살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장쩌민은 당시 1.14 계획이 중도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캐나다에서의 암살 기도 실패


      2002년 캐나다 국회의원이 캐나다, 중국 및 전 인류에 대해 파룬궁이 특별한 공헌을 했다고 찬사를 보내며 파룬궁 전파 10주년을 맞아 5월 18일부터 19일까지 토론토 대학에서 파룬궁 창시인을 초청해 강연을 요청했다. 이 소식을 중공 측이 탐지한 후 중공은 또 파룬궁 창시인에 대한 암살계획을 준비했다.


      하지만 참가 인원이 너무 많아 원래 5월 18일 토론토 대학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5회 캐나다 파룬따파 수련심득교류회’는 갑자기 장소를 변경해 2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쉐라톤 호텔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대회의실은 가득 찼고 입장권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장쩌민이 파견한 요원들과 매수된 흑사회 조직원은 갑작스런 일정 변경에 자신들의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5월 19일 오전 그들은 조를 나눠 행동에 돌입했다. 일부는 행사장 주변을 맴돌았고 일부는 자신들이 대륙과 홍콩에서 온 파룬궁 수련자라고 속이고  회의장에 들어가 맨 앞줄에 앉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심득교류회는 이례적으로 회의가 거의 끝날 무렵 파룬궁 창시인의 축사만 발표됐다. 결국 암살을 위해 잠입한 요원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켜 행사에 참가한 격이 됐으며, 파룬궁을 수련하는 수련자들의 진실한 체험담을 듣고 파룬궁을 제대로 이해하고 진상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특히 이날 의미심장했던 것은 행사가 끝날 무렵 무대 위로 리훙쯔 선생에게 전달할 화환이 올려졌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행사를 진행하는 사회자는 화환을 받을 사람이 회의장에 있는지 여부를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화환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파룬궁 수련자들이 단상위로 화환을 올렸다는 것은 모든 행사 참가자들에게 리훙쯔 선생께 헌화한다는 것을 분명히 공개한 모양이 되었다. 이것은 결국 리훙쯔 선생이 당시 현장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파룬궁 수련자가 된 비밀요원들


      1997년 뤄간은 공안부에 지시를 내려 전국적으로 파룬궁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뤄간은 여러 가지 증거를 수집해 파룬궁을 ‘사교’로 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전국 공안청과 공안국은 충분한 조사를 거쳤지만 “(파룬궁에 대해)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1998년 7월 공안부 1국에서 ‘파룬궁에 대한 조사를 전개할 것에 관한 통지’를 발표해 파룬궁에 대해 미리 죄를 정하고 활동상황을 파악해 위법 증거를 수집하도록 했다.


      뤄간이 발표한 문서는 미리 죄를 단정하고 나중에 증거를 찾는 모함의 성격이 분명했다. 당시 적지 않은 공안, 통일전선부와 비밀요원들이 파룬궁 연공장에 잠입해 공법을 배우고 수련지침서인 ‘전법륜’을 학습했다. 그러나 수련자들의 모든 활동은 전부 투명했고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웠으며 돈을 받거나 하는 문제점이 없었다. 많은 비밀요원들이 이런 점을 보면서 파룬궁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고 도리어 수련에 참여하여 확고한 수련자가 되었다. 뤄간을 놀라게 한 것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보고자료 중에서 파룬궁 수련자의 죄를 수집한 것은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점이다.


      뤄간은 또 공안부에서 기공을 담당한 사람마저 모두 기공을 잘 이해하고 많은 이들이 스스로 기공을 연마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몹시 초조해졌다. 뤄간은 이에 1996년 공안부를 개편해 원래 기공업무를 담당하던 사람들을 모두 전출시키는 한편 파룬궁 탄압을 위한 토대를 다졌다.


      해외에서도 많은 장쩌민 계의 특무들이 파룬궁 수련자 내부에 잠입해 파룬궁에 관한 정보를 탐지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여기서는 한 가지 사례만 들어본다.


      딩커(丁柯)라는 중국인은 한때 중국국가안전부에서 근무했고 광명일보 기자의 신분으로 미국에 파견됐다. 그는 신문 기자의 신분으로 국가안전부를 대신해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했다.


      그는 198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후 당시 중공중앙 조사부에서 한 달간 훈련을 거친 후 해외로 파견됐다. 그가 요구받은 것은 다양한 인물들을 접촉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딩커는 1999년 8,9월부터 파룬궁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CNN 방송 및 일부 서방 매체에서 톈안먼 광장과 베이징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가부좌하고 평화적으로 탄압에 항의한다고 보도하는 것을 보고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나는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평화적으로 조용히 연공하고 가부좌하고 있음에도 경찰의 난폭한 탄압과 구타를 당하는 것을 보았다. 당시 이런 모습을 보고 자신의 신앙을 위해 이런 학대를 받는 파룬궁 수련자들에 대해 몹시 동정하게 되었다. 1989년 6.4 톈안먼 사태 이후 장쩌민은 수많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1999년 톈안먼광장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수호하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 중공의 폭력에 저항한 것은 나를 크게 고무시켰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진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파룬궁은 일종의 기공으로 중국 전통의 우수한 쿵푸라고만 여겼다. 왜냐하면 나도 다른 기공을 연마한 적이 있기 때문에 기공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파룬궁에서 받은 가장 깊은 인상은 그들을 통해 진정으로 수련에서 요구하는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변화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자신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사회에 대해서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고 밝혔다.


      딩커는 이때부터 자신의 특무 임무를 포기하고 중문과 영문 사이트에 파룬궁의 억울함을 변론하기 시작했다. 파룬궁을 음해하는 임무를 띠고 해외에 나왔다가 진실한 면을 보고 오히려 파룬궁의 편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해외에서는 이런 사례들이 부지기수로 많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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